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산리 전투 (문단 편집) === 양측의 조우 === 양측이 서로 전력을 강화해 나가던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써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던 제14, 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탓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처지에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 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 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했다. 대한 독립군도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한 후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했던 홍범도 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주전론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으나 이 때는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